회원동정
관리자 2022-08-29 200
"밤과 낮 모두 품는 은빛 조각…치유의 공간이죠"
1세대 추상조각가 엄태정 개인전
50년간 사물의 본질 탐구
쇠의 물질성에 순응해 작업
명상 통한 작품세계 펼쳐
수행하듯 그린 평면회화
1960년대 초기작 등 19점
아라리오뮤지엄서 전시
로마시대 카타콤(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처럼 어두운 지하 벽돌 전시장. 대형 알루미늄판 사이에 철제 타원형 고리가 끼워진 현대적인 작품이 낯설어 더욱 강렬하다.
면과 선, 직선과 곡면, 은빛과 검정이 공존하는 입체 조형물이 무한한 우주를 상징하는 것 같다. 조각이 만든 그림자마저 공간과 어우러져 중요한 일부가 됐다. 1세대 추상조각가 엄태정 서울대 명예교수(84)의 신작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2022년)이 같은 제목의 개인전으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이 신작과 발표되지 않았던 1960년대 초기작 등 조각과 드로잉 19점을 모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원로 작가는 동명의 시를 직접 읊으며 작품을 소개했다.
"은빛 두 날개는 무한한 사이를 품고 있습니다 / 태양과 달도 / 밤과 낮도 모두를 품습니다."
자칭 '물질주의자'라면서 50년간 조각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탐구해왔던 그는 무쇠, 구리, 알루미늄 같은 금속의 물질성에 순응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의 조각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누군가(낯선자)를 만나는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공간에서 관람객들에게도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작가는 서울대 조소과 재학 시절 철의 물질성에 매료돼 평생 금속조각에 매진했다. 특히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1876∼1957)를 정신적 스승으로 따랐다. 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고도의 정신적 수행이자 명상의 시간으로 조각을 창작했던 브란쿠시처럼, 그에게도 조각은 치유의 공간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번 전시장은 한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설계하고 사옥으로 썼던 공간으로 지하 소극장이 있던 곳이다. 작가는 김수근 선생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전시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김 선생이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을 맡았을 당시 국전에 입선한 작가들 작품을 설치하려 연락하며 인연은 시작됐다. 한때 공간 사옥 입구에 그의 조각이 설치됐으나 유실됐다. 이 전시를 계기로 아라리오뮤지엄이 소장하게 된 진취적 기상의 철 조각 '기 No.3'가 대신 세워졌다.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했다 도난당했던 작품을 작가가 지난해 다시 제작했다.
과거 소극장의 배우 대기실이던 곳은 마치 숨겨진 성소처럼 좁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날개가 셋 달린 새 조각 '삼익조-하늘새'(1969년)를 만날 수 있다. 천사같이 넓은 날개를 활짝 펼친 이 조각은 초기 작품답게 격정적인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느낌이 강하다. 매끈한 구리 표면과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거친 내면이 대비된다.
반면 최근작은 고요하고 온화하면서 명상적이다. 자석을 구부린듯한 형상의 '철의 향기'(2021년)는 철판 2개를 'U'자 모양으로 구부리고, 직각으로 연결하는 부위에 구리를 사용했다. 하나의 굵은 선처럼 이어진 작품 내부가 철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전시의 주인공 같은 조각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2022년)은 무게가 1.5t이나 되고 높이가 2.45m에 달해 전시장 출입문을 통과하지 못해 해체했다가 다시 용접해야 했다. 이 작품들은 2019년 프리즈 런던 때 함께 열린 '프리즈 런던 스컬프처'에 전 세계 조각가 23명 중 뽑혀 런던 리젠트 파크의 잉글리시 정원에서 전시됐던 '두 개의 날개와 낯선 자'(2018년)와도 닮아 있다.
조각 외에도 작가가 꾸준히 수행하듯 그려온 아크릴 회화와 펜화 등 다양한 평면 회화가 한 공간에서 조각과 조응한다. 붉은색과 금색이 미세한 색과 형태의 반복으로 완성되는 대형 회화 '만다라-시간의 향기를 담다' 연작과 가는 펜으로 점을 찍듯 면을 채워간 '흑백의 공간과 시간 I, II, III'가 대표적이다.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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